익숙한것이 생경해지는 순간들

2024-10-06

길고길었던 여름이 끝나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동안엔 숨막히듯 더운 바깥을 돌아다니다가 에어컨이 틀어진 실내로 들어오면 그 시원한 공기가 그렇게 달콤할 수 없었는데. 이젠 밤에 샤워를 하면 열어둔 창문에서 부는 바람이 썰렁하다못해 시려서 창을 닫게 된다. 

몇달간 집에 악성재고마냥 한쪽 벽에 쌓아둔 이불이 있었다. 시원한 바람 한번 불었을 뿐인데, 짐짝에서 ‘소중하고 포근한 이불' 로 이미지가 바뀌어버린다. 이렇게 시선이 바뀌어버린다고?



#자수전

한여름의 정점이던 7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한 자수전을 보고왔다. 친구가 2번이나 갔다기에 뭐 구체적으로 찾아보지도 않고 숫자'2’에 신뢰감이 우뚝 솟은채로 보러갔다. 

세상에 이게 그림인지 사진인지, 정말 세밀하고 정성스런 자수들이 존재만으로도 압도감을 풍기고 있었다. 조선시대 기품있는 왕족의 옷, 일제강점기에 여학교에서 단체로 지은 작품, 가정의 복과 행운을 빌며 지은 어머니의 작품까지 그 한 땀 한 땀이 모여 큰 그림을 완성하는 과정을 생각하면 참으로 귀한것이 틀림없었다.

“조상들의 공예 중 이 자수가 더의 아낙네들의 몫이고 생활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공예에 비해 획기적인 변혁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옛 전통을 고수하면서 아울러 미세하고 정교한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자수의 본질이 아닐까 싶다.” - 박을복 1995


“우리나라의 전통자수품은 역사의 안방에서 애지중지 귀염을 받다가 시대가 바뀜에 따라 그 참값을 모르는 채 그저 ‘귀한 것'으로만 비장되어 오다가 근자에 이르러 일부 학계에서 주목의 대상이 되었을 뿐, 일반인을 물론이요 차지도외가 되어 그 진가가 제대로 규명되지 못한 채 방치되어 왔음이 사실이다” - 허동화 1978




‘그래 우리 할머니 작품도 있었지' 

이 전시를 보며 감탄과 놀라움을 반복하다가 우리집에도 이런 작품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우리 엄마는 자수나 뜨개질을 하면 시간을 낚고 있다는 표현을 쓴다. 그래서 할머니의 작품을 보여주면서도 ‘울엄마의 처녀 때가 이 작품에 녹아든거야. 시집올 때 이런 정성 작품이 필수 였거든.’이라 여러번 표현했는데, 다시금 보니 그 시간이 뭉쳐 지금에 와있음이 참 생경하게 느껴진다. 



#잡지

메종투메종이라는 전시에서 마리끌레르 1993년 창간호를 보게 됐다. ‘새로운 물건' 을 소개하는 코너엔 마늘을 빻아주는 기계, 남은 음식을 밀봉해두는 클립, 한 잔만 우릴 수 있는 녹차티백 등이 있었다. 

‘그때의 시선엔 이런게 신기했구나. 지금은 참 익숙한데.’ 그 시선이 귀엽게 느껴졌다. 


또 다른 코너엔 한 한복브랜드의 쇼룸이 소개되어있다. 시원스레 드러난 대나무 쪽마루, 아담한 흙담, 우리스러운 여백의 미, 그리고 여백을 채워주는 옹기들. 30년전 인테리어임에도 너무 세련되 보였고, 무엇보다 우리스러운 요소들과 잘 어우러져있어서 그런 게 잘 남아있던 때라 부러워보였다. 

글의 하단을 읽고는 나의 오해였다는걸 깨달았다. 에디터는 여느 다른 쇼룸과는 다른 한국적인 정취의 보존을 칭찬하고 있었던 것. 


‘아 그때도 이런걸 보존하는게 힙이었구나’



#나가오카 겐메이

알게된지 얼마 안된분께서 책을 선물해주셨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너무 유명한 D&Department의 창립자 나가오카 겐메이가 쓴 ‘또 하나의 디자인' 이다. 

그는 1995년부터 취미삼아 재활용품점을 돌아다닌다. 디자이너로 일했었기 때문에 ‘좋은 디자인' 이란 뭘까 에 대한 답을 찾으려 수많은 재활용품점을 다녔다고 한다. 

“쾌적한 가게에는 대게 좋은 디자인의 물건이 없었다. 그런 가게에는 주로 ‘잘 팔리는’ 물건이 있고, 새로운 디자인에 높은 가치를 매긴다. ‘새롭다'거나 ‘유명하다'는 기준을 걷어내고 보아야 비로소 나만의 평가기준이 생긴다. 그 기준에 열중했다.”


이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디자이너로서의 사명감과 자신만의 기준에 대해서도 꾸준히 탐구한다. 디자인된 물건을 선보임으로써 이 세상의 질을 조금이라도 높이려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할 뿐더러, 좋은 디자인이어야 물건의 생명이 오래 간다고 여긴다. 때문에 무조건 새로운 것은 자기의 기준이 아니라는 것. 


작게나마 나가오카 겐메이의 문장에서 위로를 얻는다. 


‘난 사명감같은건 크게 없지만, 새로운건 정이 안가. 이건 좀 같네'


이 외에 은근한 위로를 받은 문장들 몇가지


*우리는 매일 여러 가지 물건을 본다. 그중에는 이미 좋은 평가를 받아 무대에 오른 물건이 있는가 하면, 아직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으나 희미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물건이 있다.”


“만들지 않기의 또 다른 방법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은, ‘계속하기’다. 전통기술은 지속할 가치가 있다. (...) 사람은 누구나 ‘과거 훌륭한 시대의 모습'을 지키려고 한다. 하지만 지켜야 할 것은 기술이지, 스타일이 아니다.”


“계속하기에는 버틴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 산지의 시간 흐름은 그곳을 잘 아는 사람에게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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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의 무거움이 달라졌을 때 시선이 달라지는 것처럼. 나에게 다른 공기를 불러와주는 것들을 기록했다. 다가오는 가을과 겨울에도 이런 사건들이 많이 생겼으면.